컨디션도 너무좋고 깔끔합니다.

잘놀다가요 ~

70. 이면(22)

하인병에 걸려 생매장을 당한 여인, ‘이비’가 깨어난 건 이틀 전 새벽 무렵이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기에 당장이라도 심문을 벌이고 싶었다. 스타토토사이트 당시는 이미 해까지 뜬 뒤라 슬슬 교원숙사로 복귀해야 하는 시점이었고, 이비는 하인병을 앓는 사이 몸 상태가 피폐해진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그녀는 원래 살집이 조금 있는 편이라고 했다. 산송장이 돼버린 뒤로 적절한 보살핌을 롤토토사이트 못했고, 이에 따라 섭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지금처럼 말라붙은 거라나.

어쨌든 이틀 전 아침엔 나나 그녀나 대화를 나눌 조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토끼굴에 머무르며 정양하도록 했고, 이오피야를 간호 겸 감시역으로 곁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오늘, 매반 강의가 끝나자마자 토끼굴로 달려갈 생각이었는데……. 불가피하게 일정이 지연되었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무려 넷이나 만난 탓이다.

엄밀히 말해, 그 장애물들이 모두 예상외는 아니었다. 개중 첫 번째가 특히 그랬다.

결투의 홀 관람석에서 매반 수업을 구경하던 에아디나 왕녀, 그녀가 바로 첫 번째 장애물이었으니까.

“저는 검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강의가 끝나자마자 단련의 관을 나서던 나를 하녀를 시켜 불러세운 왕녀는, 마치 치하하는 것처럼 참관의 감상을 밝혔다.

“그래도 인상적이었어요. 운영위원회의 검증 요구를 그리 당당히 거부한 게 이해가 된다고 할까요.”

“……칭찬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내가 모호한 표정으로 답하자, 왕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그래야죠. 실제로도 칭찬이니까……. 좀 걸을까요?”

듣기에는 가벼운 제안 같았으나, 그녀의 신분이나 내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하릴없이 에아디나를 따라 주랑을 거닐었다.

잠시간 한담이 오갔다.

누가 왕족 아니랄까 봐, 그녀는 전형적인 궁정의 화술을 구사했다. 신변잡기나 왕국의 정세 등 쓸데없는 롤베팅 늘어놓으며 변죽만 울려댔다는 뜻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마냥 괴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여러 걸리적대는 조건을 모두 떼고 보았을 때, 에아디나는 롤배팅 아름다운 소녀였으니까. 원래 아름다운 건 구경만 해도 재밌는 법 아닌가.

에아디나는 나이치고도 키가 큰 편이 아니었고, 나는 루도로 위장하며 덩치가 꽤 줄긴 했지만 여전히 장신이었다. 덕분에 가까이 붙어 걸으면 왕녀가 고개를 한껏 꺾어야만 했는데, ‘감히’ 그런 불편을 겪게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어느 정도 떨어져서 걸어야만 했다.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그녀를 조금 더 잘 관찰할 수 있었다.

옅은 귤색 머리칼은 한쪽으로 길게 땋아 늘어뜨렸고,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로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퍽 귀여웠으며, 선명하다 못해 조금 날카롭기까지 한 눈매는 가식인지 진심인지 모를 호의로 흐려진 덕분에 오히려 보기 좋았다.

음, 아쉽다. 한 서너 살만 많았으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내가 딴생각이 슬슬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던 차, 드디어 왕녀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내 경호책임자인 오기에 경은 근위대의 부대장이세요. 사람들 말로는 왕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사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저 뒤편에서 묵묵히 따라오는 사내를 근위대의 2인자 자리에 올려준 건 검술일까, 아니면 정령술일까? 곰 같은 체구를 보면 영락없이 힘과 기량에 집중한 순수기사 같은데, 정작 들려오는 소문은 온통 정령술에 대한 것뿐이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오기에 경도 마지못해 인정하시던걸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선보인…… 카발니 류라고 했나요? 그 비기요. 조악한 흉내 정도가 아니라고, 검백 본인이 펼쳤다고 스타베팅 믿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수였다고 하시던데.”

난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왕족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겠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턱도 없이 과분한 평가군요.”

“그런가요?”

“오기에 경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는 평생 왕국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잖습니까. 카발니 류를 제대로 익힌 제국기사조차 만나본 적이 없을 텐데, 검백과 비교를 하다니.”

“루도, 당신은 다르다는 걸로 들리는군요.”

“왕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제국에서 왔습니다. 이것저것 경험해볼 기회가 많았죠. 덕분에 겉핥기로 몇몇 기술을 익혔지만, 절대로 원조와 비할 바는 아닙니다.”

“흐음.”

아무래도 오기에가 지금의 자리를 따낸 건 검술보다는 정령술의 공이 큰 모양이다. 정확한 실력이야 까봐야 알겠지만, 안목이 형편없는 걸 보니 별로 대단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아무리 ‘세 머리 뱀’을 전력으로 펼친다 해도 검백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는 게 당연했다. 전체적인 롤드컵토토 면에서도 차이가 있겠고, 무엇보다 투아셀로가 뿌린 검격은 그 그림자가 셋이 아니라 넷까지 늘어나 사실상 ‘네 머리 뱀’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기에가 ‘검백이 펼쳤다고 해도 믿겠다’ 운운한 건 완전히 개소리였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던가, 아니면 잠재적인 적들을 내심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오기에가 개눈깔을 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일까. 근위기사 전체에 대한 기대도 롤토토 쪼그라드는 것 같다.

혹시 근위대장인 칼리오라도 순 거품인 건 아닐까?

‘성벽을 부수는 자’니, ‘중간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니, ‘검귀’니, 온갖 별명을 달고 있는 걸 보면 나름 대단한 양반일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으니 도저히 가늠이 안된다.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어, 예?”

“오만한 것 같으면서도 겸손하고, 건방진듯하면서도 정중하고.”

엉뚱한 말에 무어라 반응하려는데, 왕녀가 모르는 척 또 다른 질문을 이어갔다.

“제국에 있을 땐 군문에 종사했다고 했죠?”

“아, 그게……. 군문이라기보다는, 한 십 년쯤 칼밥을 먹었습니다.”

“칼밥이라. 용병이었다는 뜻이죠, 그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루도는 면허까지 받은 검호잖아요. 평범한 검객도 아닌 면허자가 고작 용병이라니. 제국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저 같은 경우야 용병 노릇을 하던 중 유파에 들었으니 꽤 특이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 그럼 평범한 검호들은 어떤가요? 역시 황실이나 선제후의 휘하에서 제국기사로 복무하는 게 기본이겠죠?”

……이런 건 갑자기 왜 묻는 거지? 루도에 대한 신상이야 조비언 백작의 추천장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을 텐데.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는 충분히 대비를 해두었다. 덕분에 에아디나가 꼬치꼬치 스타토토 와중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답변을 내놓을 수 있었다.

용병 출신의 검호 루도가 남방대륙 개척과 게벤-프로드시 내전을 겪은 뒤 왕국으로 넘어와 조비언 백작 휘하에 들게 된 사연까지. 이 호기심 많은 왕녀는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겠다는 신중히 귀를 기울였다.

“……격랑으로 가득한 삶이라.”

왕녀는 나지막이 감탄을 흘리더니 어째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작게 심호흡하며 홀덤사이트 여는 것이었다.

“조금 사적인 이야기를 물어도 될까요?”

“……예, 뭐. 지금까지 한 것도 충분히 사적인 이야기였는데요.”

“아?”

순간 멍청한 표정이 된 에아디나는 입을 가리더니 꺄륵 온라인홀덤 터뜨렸다.

“이런,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나도 모르게 실례를 저질렀어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네, 그럴게요.”

의례적인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 과연 왕족이다. 가정교육이 좀 덜 됐어.

“당신, 왜 여기 있는 거죠?”

“……예?”

“그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기껏 선택한 일이 용병, 교사라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워서 말이죠.”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나름대로 기습적인 반문이었지만, 왕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홀덤사이트 해보였다.

“출세죠.”

“……출세, 말입니까?”

“내가 루도였다면 여러 대영주-아니, 황제와 선제후들 중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온라인홀덤 골라 휘하에 들어갔을 거예요. 공을 쌓아 영지를 얻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을 쳤겠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 누구나 원하는 길인데.”

“어……. 글쎄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모습에 왕녀도 덩달아 의아한 기색이 되었다. 그리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질문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출세하고 싶지 않나요?”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이건 내 예상에 없는 대화였고, 당연히 숙지해둔 답변 같은 것도 없었다. 임기응변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다.

“음, 뭐. 당연히 저도 출세하고 싶습니다. 다만…….”

“다만?”

“그러자면, 왕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게 싫습니다.”

“네?”

나는 순간적으로 짜낸 핑계를 나름 정리해 설명했다.

“저는 가진 거라곤 칼 쓰는 재주뿐인 무인입니다. 그리고 무인이 누군가에게 쓰임을 받자면 반드시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남의 목숨이든, 자신의 목숨이든.”

“……아.”

왕녀는 작게 입을 벌렸다.

“충성을 바치는 건 곧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런 건가요?”

나는 왕녀의 멍한 반응을 본 다음에야 내 실수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의 충성이란 용역계약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부하가 충성을 바치면 주군은 그에 대한 대가를 제공해야만 한다. 이런 관계에서 목숨을 다한 충성이란 절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러한 충성은 유교 문화권에서나 통용되는 것이고, 여기는 공맹의 가르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니 에아디나가 내 답변을 기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말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세하고 싶은 거야 저도 마찬가지지만, 누군가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게다가 제가 평생 용병질하며 깨달은 게, 목숨보다 귀한 건 없다는 사실입니다.”

“……네.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의 자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재주를 살리며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니, 제가 보기엔 이보다 나은 일이 없군요.”

난 가볍게 웃어 보였으나, 왕녀는 썩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겠어요.”

어쩐지 결심 같은 것이 묻어나는 중얼거림이었다.

내가 괜스레 불안해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왕녀는 짐짓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만 가봐요. 나는 아직 여기에 남은 용무가 있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전하. 그러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으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고요.”

“어, 네?”

“또 보죠.”

내가 그 말뜻을 묻기도 전에 왕녀는 휙 뒤돌아서 거느린 무리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어,”

뭔가 단단히 꼬인 느낌이다.

나의 악당들 588화

70. 이면(21)

밀라놀 왕립종합대학을 세운 ‘독안왕’ 에아둠 2세는 칙령을 내려 대학에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갖춰야 할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흠 없는 신앙과 단단한 충성, 빛나는 재능과 뜨거운 열정이 그것이었다.

일견 상투적인 표현 같았지만, 달리 말해 저 네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든 왕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독안왕의 강력한 의지로 관철된 이 선진적인 칙령은, 후대 왕들의 흔들림 없는 지지 아래 1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효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현재 왕립대학에서 수학 중인 삼천여 명의 학생들이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한, 각양각색의 출신성분을 지닌 인재들 말이다.

멋모르는 외부인이야 이 많은 학생들을 오직 귀족과 평민으로만 구분할 것이다. 중앙대륙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이분법에 따라서 말이다.

하지만 대학의 사정을 알면 알수록 학생을 나누는 갈래는 끝도 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학생 정원의 8할 이상을 차지하는 평민들이야 달리 말할 것도 없고, 오백이 채 안 되는 귀족 학생들 역시 이런저런 기준에 따라 수십 갈래로 나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의 학급’에 속한 일곱 명의 경우, 어느 기준으로 봐도 상류층에 속했다.

크럴리와 버컨은 평민이지만 각각 왕실과 알파드 후작 가문을 뒷배로 둔 만큼 어지간한 영지귀족의 자제들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기리온은 남작의 삼남에 불과했으나, 그의 가문인 ‘카스팔로’는 고대제국 시절의 금석문에서도 이름이 발견될 만큼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제오레 왕조가 이백 년도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카스팔로가 ‘근본 없는’ 귀족들 사이에서 진짜배기를 자부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유프리아는 프릭스 변경백의 조카인 만큼 최상류층에 속하는 게 당연했고, 나머지 세 수강생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자신이 백작 작위를 지니고 있으니까.

온우터의 그둔과 하이랜드의 가윈-그리고 퍼라이트의 파시테아 말이다.

“……백작님. 백작님?”

‘결투의 홀’ 한복판에 대자로 뻗어 있던 파시테아는 곱게 이마를 찌푸렸다.

“왜.”

“왜는요. 인제 돌아가셔야죠. 강의 끝난 지도 한참인데.”

“조금만 있다가.”

“백작니임.”

모시는 주인이 눈길도 주지 않자 젊은 시녀는 썩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체면도 좀 생각하셔요. 이런 돌바닥에 계속 누워 계실 셈이세요? 땀으로 범벅을 되셔서는.”

“아무도 없잖아.”

백작의 말대로였다. 매 학급의 다른 학생들은 시종들의 부축을 받거나 기다시피 어기적대거나 하며 진즉에 홀을 떠난 차였다.

“그래두요. 곧 다음 강의도 시작할 테고-”

“우리가 마지막이래. 선생이 그랬어.”

“……으응,”

젊은 시녀가 설득할 말을 찾느라 입을 다물었다. 눈감고도 그 얼굴이 보이는 듯, 파시테아가 말을 덧붙였다.

“땀만 식히고 가자. 진짜 힘들어서 그래. ”

“으휴……. 정말.”

시녀가 근처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에 파시테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실내 훈련장 두 면에 트인 창을 통해 산들바람이 흘러들어 온 몸에 차오른 열기를 덜어주었다. 곁에 앉은 시녀가 길고 풍성한 흑발을 손으로 빗겨줄 때마다 정수리까지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파시테아로서는 썩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렇게 땀에 푹 젖은 건 왕도에 온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하여튼 그 무렵부터 작년 봄까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을 했더랬다. 만약 그녀보다 무재가 뛰어난 동생이, 특히 남동생이 태어났더라면 중도에 그만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끝내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성인이 된 직후, 출산 중 명을 달리한 어머니에 이어 백작위에 올랐다. 그러나 파시테아는 여전히 가문 기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즈음에는 하루 열네 시간씩 이어지는 혹사도 그리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 생활의 관성이나 기사들이 미처 숨기지 못한 찬탄, 날로 가벼워지는 몸에 대한 신기함도 한몫씩 했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시녀였다.

“으, 축축해. 오늘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까지 땀을 흘리셨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씻어야겠어요. 백작님이 이러시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왕도에서까지 이러시면 제가 얼굴을 못 들고 다녀요. 다른 학생들이 흉본다고요.”

시녀는 올해 스무 살로 파시테아보다 겨우 한 살 많았지만 말하는 투는 애를 서넛쯤 낳은 중년의 부인 같았다. 파시테아가 그녀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종알거리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연무장 바닥에 누운 파시테아의 몸이 더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거칠던 심장박동이 점차 잦아들고 손목의 통증도 가라앉았다.

조금 안정을 되찾은 덕일까, 파시테아는 문득 방금의 강의를 떠올렸다.

‘다들 도도한 척 하더니.’

그녀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매의 징표를 받은 일곱 명이 모두 출석한 것부터가 파시테아에게는 꽤 재밌는 일이었다. 크럴리와 버컨이야 그 뒷배가 어찌 됐든 신분은 평민이니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다섯은 콧대 높은 고위 귀족이 아닌가.

그런데도 한 명도 빠짐없이 결투의 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평가 때 그런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하고도 말이다.

출결이니 성적이니 하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여느 평민 학생이라면 몰라도, 매 학급의 귀족 학생들처럼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그딴 것에 구애되는 형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국왕이 각지의 숱한 젊은 귀족들을 왕립대학으로 불러 모은 목적은 왕실과의 친교 및 근왕파로의 회유였다. 더 노골적으로, 또 단순하게 표현하면 볼모겠고. 학업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아마 대부분의 대가문 소속 학생들은 왕립대학에서 한 2년쯤 시간을 보낸 뒤 그럴싸한 학위 몇 개 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물론 왕의 눈치를 봐서라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겠지만, 제국에서 왔다는 어중이떠중이의 수업을 듣는 건 그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자유 7과에 속하는 군사학의 분과 강의인데다, 강사는 대학의 정교사도 아니지 않나. 학위를 받아야 하는 고등 3과의 수업이라면 또 몰라도, 이런 부수적인 강의쯤은 빼먹는다 해도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매 학급 학생들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결투의 홀에 출석했다. 파시테아로서는 그 이유를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다들 그녀 자신과 같은 이유일 테니까.

‘……대체 뭐지, 그 자식은.’

제국에서 왔다는 선생은 정말 괴상한 작자였다. 감히 평가 따위를 한답시고 ‘사자의 홀’로 학생들을 불러 모을 때부터 그랬다.

외양이야 전형적인 겔란인,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지저분한 머리칼, 날카로운 눈빛과 장대한 체격 등-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방랑검호의 모습을 현실에 그려놓은 것 같다고 할까.

반면 보이는 언행은 친절하고 정중하면서도 가볍기 그지없어서 위화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선술집 중노미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린 주인을 놀려먹는 하인 같기도 했다.

그런데 또 선보이는 기량은 가문 최고의 기사인 로디온 경을 연상케 했다. 또래 중에서는 검을 겨룰만한 상대가 손에 꼽는다고 자부하는 파시테아는 물론, 현왕의 치세를 대표하는 기사가 될 아서 자작조차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근위대장 칼리오라의 막내아들이자 천재 검사로 유명한 ‘슈리프스’도 5분을 버티지 못했다고 들었다.

덕분에 여러 귀족 학생들은 이 엉뚱한 초빙교사를 마냥 오만한 놈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의 신분이야 어쨌든 그 기량은 평가를 운운하기 충분한 것이었으므로.

게다가 그는 평가라는 핑계로 수백 명의 학생들을 꺾는 와중에 제국 유파들의 기술들을 조금씩 선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평가를 통해 검술교사로서의 기량을 증명한 동시에 앞으로 진행될 강의내용까지 예고한 것이다.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별수 있겠나. 호기심은 이미 샘솟기 시작했는걸.

아수베르크에서 왔다는 검호는 고작 일주일 만에 귀천 막론하고 왕립대학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콧대 높은 귀족들, 특히 무(武)에 뜻이 있는 학생들은 뭔가 쓸만한 가르침을 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진행된 첫 강의에서, 검호 루도는 매 학급에 속한 학생들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한편 호기심은 전보다 더욱 증폭시켰다.

‘당연하지. 그런 걸 봤으니…….’

‘세 머리 뱀’이 펼쳐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다른 소드마스터도 아니고, 황실에 속한 모든 제국 기사들의 스승이라는 ‘검백(劍伯)’ 투아셀로의 비기 말이다.

파시테아가 속으로 더욱 경악한 건, 뒤늦게 강의 홍보 전단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린 덕이었다.

-초빙교사 루도.

-미테르게란트 제국민, 아수베르크에서 수련…….

……조비언 백작 각하의 훈련관으로 복무.

-오히트 류에 사범 면허. 그 외 4개 유파(호르히우·시그밀·오고세·코발)에 숙달.

검백 투아셀로는 카발니 류를 대표하는 달인이다. 루도 스스로 면허를 받았다 밝힌 오히트 류도 아니고, 숙달이라 표현한 네 개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런 카발니 류의 비기를 선보인 것이다.

놀랍다 못해 의심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강의 때는 이를 떠올릴 겨를조차도 없었다.

이유야, 그 유명한 검백의 비기를 직접 받아내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느긋이 보세요. 얼마든지 보여드릴 테니.

검호 루도는 자신이 뱉은 말을 철저히 지켰다. 일곱 학생들을 대상으로 카발니 류의 비기를 백 번도 넘게 쏟아낸 것이다.

처음에는 귀한 장면을 눈에 담느라 반쯤 얼이 빠져 있었더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특유의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뽐내는 검호를 앞에 두고 검백의 비기를 ‘맛보려면’-루도의 표현이다-억지로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러고도 딱 스무 번 만에 탈진하여 지금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시죠, 다들?

바닥을 나뒹구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검호 루도는 속없이 헤실거렸다.

-뭐, 그럼 오늘은 이만 마무리할까요……. 모레까지 파훼법을 준비해오시면 됩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제 와서 생각한 거지만, 그 해맑은 작별 인사마저 기이하게 느껴졌다. 강의의 만족도와는 별개로,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결투의 홀 한복판에 대자로 누워 방금의 강의를 곱씹던 파시테아는, 입구 쪽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슬쩍 실눈을 떴다.

이를 알아차렸는지, 곁에 앉아 있던 시녀가 덩달아 그쪽을 돌아보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밝은 빛으로 이끄시기를-왕녀 전하를 뵈옵니다.”

“오랜만이에요.”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다가온 건 근위부대장 오기에 등 몇몇 호위와 시중들을 거느린 에아디나 왕녀였다.

관람석에 앉아 강의를 참관하던 그녀는, 강의 종료 직후 루도를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더랬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결투의 홀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전하-”

백작이 얼른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왕녀는 옅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붓한 시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은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에아디나의 어머니인 두컨 왕비는 헬름워스 사람이었고, 파시테아는 그 가문의 당주였다. 다시 말해 둘은 사촌지간이었다.

물론 고작 그런 것으로 파시테아의 태도가 느슨해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백작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헬름워스는 제오레라는 거목 아래 붙은 버섯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송구하다는 듯 에아디나의 손길을 피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장 밝은 빛이 임하기를, 에아디나 왕녀 전하.”

“아이, 언니.”

왕녀는 짐짓 이마를 찌푸리며 투덜거렸지만, 백작은 이를 못 본 체하며 질문했다.

“하문하고자 하시는 것은?”

“……쯧. 알겠어. 보는 눈이 많다 이거지?”

에아디나는 혀를 차며 파시테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당황한 백작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왕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오랫동안 친자매처럼 교류해온 덕에, 그녀의 속내를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두 사촌은 늘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른 것을 느끼곤 했다. 파시테아가 방금 강의로 의심을 품게 되었다면, 에아디나가 품은 건 욕심일 터였다. 대개 그랬으니까.

“왕궁으로 가자. 얼른.”

막무가내로 자신을 잡아끄는 왕녀의 모습에, 파시테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녀는 직감했다. 제오레의 변덕에 또다시 헬름워스가 휘말리게 될 것임을..

나의 악당들 589화

70. 이면(22)

하인병에 걸려 생매장을 당한 여인, ‘이비’가 깨어난 건 이틀 전 새벽 무렵이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기에 당장이라도 심문을 벌이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해까지 뜬 뒤라 슬슬 교원숙사로 복귀해야 하는 시점이었고, 이비는 하인병을 앓는 사이 몸 상태가 피폐해진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그녀는 원래 살집이 조금 있는 편이라고 했다. 산송장이 돼버린 뒤로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이에 따라 섭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지금처럼 말라붙은 거라나.

어쨌든 이틀 전 아침엔 나나 그녀나 대화를 나눌 조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토끼굴에 머무르며 정양하도록 했고, 이오피야를 간호 겸 감시역으로 곁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오늘, 매반 강의가 끝나자마자 토끼굴로 달려갈 생각이었는데……. 불가피하게 일정이 지연되었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무려 넷이나 만난 탓이다.

엄밀히 말해, 그 장애물들이 모두 예상외는 아니었다. 개중 첫 번째가 특히 그랬다.

결투의 홀 관람석에서 매반 수업을 구경하던 에아디나 왕녀, 그녀가 바로 첫 번째 장애물이었으니까.

“저는 검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강의가 끝나자마자 단련의 관을 나서던 나를 하녀를 시켜 불러세운 왕녀는, 마치 치하하는 것처럼 참관의 감상을 밝혔다.

“그래도 인상적이었어요. 운영위원회의 검증 요구를 그리 당당히 거부한 게 이해가 된다고 할까요.”

“……칭찬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내가 모호한 표정으로 답하자, 왕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그래야죠. 실제로도 칭찬이니까……. 좀 걸을까요?”

듣기에는 가벼운 제안 같았으나, 그녀의 신분이나 내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하릴없이 에아디나를 따라 주랑을 거닐었다.

잠시간 한담이 오갔다.

누가 왕족 아니랄까 봐, 그녀는 전형적인 궁정의 화술을 구사했다. 신변잡기나 왕국의 정세 등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변죽만 울려댔다는 뜻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마냥 괴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여러 걸리적대는 조건을 모두 떼고 보았을 때, 에아디나는 지극히 아름다운 소녀였으니까. 원래 아름다운 건 구경만 해도 재밌는 법 아닌가.

에아디나는 나이치고도 키가 큰 편이 아니었고, 나는 루도로 위장하며 덩치가 꽤 줄긴 했지만 여전히 장신이었다. 덕분에 가까이 붙어 걸으면 왕녀가 고개를 한껏 꺾어야만 했는데, ‘감히’ 그런 불편을 겪게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어느 정도 떨어져서 걸어야만 했다.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그녀를 조금 더 잘 관찰할 수 있었다.

옅은 귤색 머리칼은 한쪽으로 길게 땋아 늘어뜨렸고,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로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퍽 귀여웠으며, 선명하다 못해 조금 날카롭기까지 한 눈매는 가식인지 진심인지 모를 호의로 흐려진 덕분에 오히려 보기 좋았다.

음, 아쉽다. 한 서너 살만 많았으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내가 딴생각이 슬슬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던 차, 드디어 왕녀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내 경호책임자인 오기에 경은 근위대의 부대장이세요. 사람들 말로는 왕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사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저 뒤편에서 묵묵히 따라오는 사내를 근위대의 2인자 자리에 올려준 건 검술일까, 아니면 정령술일까? 곰 같은 체구를 보면 영락없이 힘과 기량에 집중한 순수기사 같은데, 정작 들려오는 소문은 온통 정령술에 대한 것뿐이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오기에 경도 마지못해 인정하시던걸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선보인…… 카발니 류라고 했나요? 그 비기요. 조악한 흉내 정도가 아니라고, 검백 본인이 펼쳤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수였다고 하시던데.”

난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왕족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겠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턱도 없이 과분한 평가군요.”

“그런가요?”

“오기에 경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는 평생 왕국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잖습니까. 카발니 류를 제대로 익힌 제국기사조차 만나본 적이 없을 텐데, 검백과 비교를 하다니.”

“루도, 당신은 다르다는 걸로 들리는군요.”

“왕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제국에서 왔습니다. 이것저것 경험해볼 기회가 많았죠. 덕분에 겉핥기로 몇몇 기술을 익혔지만, 절대로 원조와 비할 바는 아닙니다.”

“흐음.”

아무래도 오기에가 지금의 자리를 따낸 건 검술보다는 정령술의 공이 큰 모양이다. 정확한 실력이야 까봐야 알겠지만, 안목이 형편없는 걸 보니 별로 대단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아무리 ‘세 머리 뱀’을 전력으로 펼친다 해도 검백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는 게 당연했다. 전체적인 완성도 면에서도 차이가 있겠고, 무엇보다 투아셀로가 뿌린 검격은 그 그림자가 셋이 아니라 넷까지 늘어나 사실상 ‘네 머리 뱀’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기에가 ‘검백이 펼쳤다고 해도 믿겠다’ 운운한 건 완전히 개소리였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던가, 아니면 잠재적인 적들을 내심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오기에가 개눈깔을 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일까. 근위기사 전체에 대한 기대도 덩달아 쪼그라드는 것 같다.

혹시 근위대장인 칼리오라도 순 거품인 건 아닐까?

‘성벽을 부수는 자’니, ‘중간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니, ‘검귀’니, 온갖 별명을 달고 있는 걸 보면 나름 대단한 양반일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으니 도저히 가늠이 안된다.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어, 예?”

“오만한 것 같으면서도 겸손하고, 건방진듯하면서도 정중하고.”

엉뚱한 말에 무어라 반응하려는데, 왕녀가 모르는 척 또 다른 질문을 이어갔다.

“제국에 있을 땐 군문에 종사했다고 했죠?”

“아, 그게……. 군문이라기보다는, 한 십 년쯤 칼밥을 먹었습니다.”

“칼밥이라. 용병이었다는 뜻이죠, 그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루도는 면허까지 받은 검호잖아요. 평범한 검객도 아닌 면허자가 고작 용병이라니. 제국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저 같은 경우야 용병 노릇을 하던 중 유파에 들었으니 꽤 특이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 그럼 평범한 검호들은 어떤가요? 역시 황실이나 선제후의 휘하에서 제국기사로 복무하는 게 기본이겠죠?”

……이런 건 갑자기 왜 묻는 거지? 루도에 대한 신상이야 조비언 백작의 추천장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을 텐데.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는 충분히 대비를 해두었다. 덕분에 에아디나가 꼬치꼬치 캐묻는 와중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답변을 내놓을 수 있었다.

용병 출신의 검호 루도가 남방대륙 개척과 게벤-프로드시 내전을 겪은 뒤 왕국으로 넘어와 조비언 백작 휘하에 들게 된 사연까지. 이 호기심 많은 왕녀는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겠다는 신중히 귀를 기울였다.

“……격랑으로 가득한 삶이라.”

왕녀는 나지막이 감탄을 흘리더니 어째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작게 심호흡하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조금 사적인 이야기를 물어도 될까요?”

“……예, 뭐. 지금까지 한 것도 충분히 사적인 이야기였는데요.”

“아?”

순간 멍청한 표정이 된 에아디나는 입을 가리더니 꺄륵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나도 모르게 실례를 저질렀어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네, 그럴게요.”

의례적인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 과연 왕족이다. 가정교육이 좀 덜 됐어.

“당신, 왜 여기 있는 거죠?”

“……예?”

“그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기껏 선택한 일이 용병, 교사라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워서 말이죠.”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나름대로 기습적인 반문이었지만, 왕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을 해보였다.

“출세죠.”

“……출세, 말입니까?”

“내가 루도였다면 여러 대영주-아니, 황제와 선제후들 중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자를 골라 휘하에 들어갔을 거예요. 공을 쌓아 영지를 얻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을 쳤겠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 누구나 원하는 길인데.”

“어……. 글쎄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모습에 왕녀도 덩달아 의아한 기색이 되었다. 그리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질문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출세하고 싶지 않나요?”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이건 내 예상에 없는 대화였고, 당연히 숙지해둔 답변 같은 것도 없었다. 임기응변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다.

“음, 뭐. 당연히 저도 출세하고 싶습니다. 다만…….”

“다만?”

“그러자면, 왕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게 싫습니다.”

“네?”

나는 순간적으로 짜낸 핑계를 나름 정리해 설명했다.

“저는 가진 거라곤 칼 쓰는 재주뿐인 무인입니다. 그리고 무인이 누군가에게 쓰임을 받자면 반드시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남의 목숨이든, 자신의 목숨이든.”

“……아.”

왕녀는 작게 입을 벌렸다.

“충성을 바치는 건 곧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런 건가요?”

나는 왕녀의 멍한 반응을 본 다음에야 내 실수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의 충성이란 용역계약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부하가 충성을 바치면 주군은 그에 대한 대가를 제공해야만 한다. 이런 관계에서 목숨을 다한 충성이란 절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러한 충성은 유교 문화권에서나 통용되는 것이고, 여기는 공맹의 가르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니 에아디나가 내 답변을 기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말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세하고 싶은 거야 저도 마찬가지지만, 누군가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게다가 제가 평생 용병질하며 깨달은 게, 목숨보다 귀한 건 없다는 사실입니다.”

“……네.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의 자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재주를 살리며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니, 제가 보기엔 이보다 나은 일이 없군요.”

난 가볍게 웃어 보였으나, 왕녀는 썩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겠어요.”

어쩐지 결심 같은 것이 묻어나는 중얼거림이었다.

내가 괜스레 불안해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왕녀는 짐짓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만 가봐요. 나는 아직 여기에 남은 용무가 있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전하. 그러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으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고요.”

“어, 네?”

“또 보죠.”

내가 그 말뜻을 묻기도 전에 왕녀는 휙 뒤돌아서 거느린 무리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어,”

뭔가 단단히 꼬인 느낌이다.